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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거리의 냉혹한 탐정 -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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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5-12-3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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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말로.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여 경찰직을 내려놓은 사립 탐정. 그런 그에게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 스턴우드 장군이 의뢰를 맡긴다. 자기에겐 비비언과 카멘이라는 문제 많은 두 딸이 있는데, 최근에 아끼던 사위인 (곧 비비언의 남편인) 러스티 리건이 실종되어 심란한 와중, 카멘과 관련된 무언가를 빌미로 일천 달러를 협박하는 가이거라는 놈이 나타났다는 것. 몇 달 전에 비슷한 수법으로 오천 달러나 뜯어간 조 브로디라는 놈이 있기도 해서, 말로는 가이거를 추적하여 집 앞에 잠복해 있는다. 그런데, 대뜸 총성이 울려 집 안에 들어가 보니, 가이거는 죽어 있고 카멘은 벌거벗은 상태로 약에 취해 있다. 게다가 다음 날엔 스턴우드가의 운전 기사인 오웬 테일러가 차와 함께 바다에 처박힌 채로 발견된다. 도대체 말로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빅 슬립』을 읽었다. 문학사적인 이야기를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더블 코트와 (원작에서 주요하게 언급되진 않지만) 사냥 모자로 대표되는 셜록 홈즈가 '고전적 탐정'의 전형이 되어 추리소설의 황금기를 열었다면, 트렌치 코트와 (마찬가지로 원작에서 주요하게 언급되진 않지만) 페도라 모자로 대표되는 필립 말로는 '현대적 탐정'의 전형이 되어 하드보일드(hard-boiled)라는 장르를 열었다. 물론 레이먼드 챈들러 이전에 대실 해밋이 있긴 했다. 『몰타의 매』가 없었다면 필립 말로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밋의 전성기는 너무나도 짧았고, 실질적으로 하드보일드를 대중 문화의 주류로 견인한 작가는 챈들러였다. 그러니 맨앞의 문장을 이렇게 바꿔도 크게 상관은 없을 테다. 『빅 슬립』을 읽었다. 다시 말해, 어떠한 장르를 결정지은 소설을 읽었다. 그렇다면 홈즈와 대비되는 말로는 어떠한 탐정인가. 그는 범인과의 지적 게임에 무심하다. 용의자를 모아놓고 온갖 트릭을 장황하게 설명하며 사건의 진상을 드러내는, 이른바 '추리쇼'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하다. 그는 차가운 농담을 내뱉으며 묵묵히 어두운 거리를 거닌다. 누가 죽든 말든 신경쓰지 않으면서. 필요하다면 권총을 꺼내기도 하면서. 추리소설의 애독자가 홈즈를 좋아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추리에 관해서는 한없이 초인에 가까운 그의 지적 능력에 매혹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홈즈는 마블 코믹스의 아이언맨처럼 때때로 지나치게 수다스럽다. 그에 반해 말로는 지극히 인간적인 탐정이지만 진중함에서 비롯된 어떤 멋이 있다. 괜히 누와르(noir) 영화가, 혹은 디시 코믹스의 배트맨이, 말로가 등장한 소설을 원전으로 택한 것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추리소설사의 정전으로 여겨지는 『블러디 머더』는 이렇게 평했다. 말로의 존재로 인하여 추리소설은 탐정소설(detective novel)에서 범죄소설(crime novel)로의 형질전환을 겪어야 했다고. 즉, 플롯보다 인물의 개성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어졌다고. (참고로 여기서 언급한 '멋'은 여성을 주변적으로 형상화한 결과기도 했다.) 『빅 슬립』은, 일본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우세종인 '(신)본격'을 기대하지만 않는다면, 나름 흡족할 만한 독서 경험을 선사하는 소설이다. 어느 순간 전까진 플롯을 따라가기도 벅차지만, 그것을 상회하는 말로의 매력에 한 번 빠지기만 한다면 어째서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가 직접 번역하겠다 나섰는지 십분 이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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